2009년 01월 08일
한글창제 반대 상소를 올린 세 사람: 최만리, 김문, 정창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김문(金汶) 의 장사(葬事)에 부의(賻儀)하는데 관곽(棺槨)과 쌀 10석, 종이 70권을 썼다. 문(汶) 의 자(字)는 윤보(潤甫) 인데, 세계(世系)가 본디 한미(寒微)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
“그 어머니가 무당노릇을 하여 감악사(紺嶽祠)에서 먹고 지냈다.” |
고 하였다. 문(汶) 은 침작하고 중후(重厚)하여 말이 적고, 젊어서는 학문을 즐겨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에 들어와서 여러 번 옮겨 주부(注簿) 가 되었고, 을묘년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으로 뽑혀 직제학(直提學) 까지 승진하였다. 경서(經書)와 자사(子史)에 연구하여 궁달(窮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학문은 통달하면서도 고루하지 아니하며, 박학(博學)하면서도 능히 정심(精深)하여서, 의리(義理)의 의심날 만한 것이나 전고(典故)의 상고할 만한 것을 묻는 자가 있으면, 즉시 대답해도 문득 맞으므로, 당세(當世)가 모두 탄복했으며, 임금도 또한 중(重)히 여겼다. 그러나 능히 저술(著述)을 하지 못하여 무릇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동료에게 지어 달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아집적(我執的)이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있어, 밖으로는 청렴하고 정숙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실상 욕심이 많으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아부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였다. 정인지(鄭麟趾) 가 일찍이 문(汶) 에게 대면하여 말하기를, |
“학문이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함을 가장 귀(貴)히 한다.” |
하니, 문(汶) 이 부끄러워하고 한스럽게 여겨, 제자(弟子) 매좌(梅佐) 를 데리고 뜰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밤새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병인년에 집현전(集賢殿)에서 항소(抗疏)로써 시사(時事)를 하나하나 들어서 논(論)할 적에 문(汶) 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아니하였으며, 또 집의(執義) 정창손(鄭昌孫) 등이 언사(言事)로써 옥(獄)에 갇혔을 적에 온 집현전이 예궐(詣闕)하여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문(汶) 만이 홀로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여론이 비루하게 여겨 말하기를, |
“ 김문(金汶) 은 육경(六經)을 통하였으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
하였다. 이에 이르러 문(汶) 을 명하여 사서(四書)를 역술(譯述)하게 하고, 특별히 자급을 승진시켜 바야흐로 장차 뽑아 쓰려고 하였는데, 중풍(中風)으로 폭사(暴死)하였다. 문(汶) 이 항상 금중(禁中)에 있을 적에그 배운 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한스럽게 여기었다. |
# by | 2009/01/08 18:05 | 도원눌어 | 트랙백(1) | 덧글(1)













제목 : 한글 창제, 식자층의 반발을 넘어
1.한글 창제 반대의 이유 세종 25년 1443년 12월 한글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기뻐서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지식층은 실제로 거의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술원 부원장에 해당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선두로 그 학사 일당 7명이 한글 창제 후 두 달째인 세종 26년 1444년 2월 대왕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문을 직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