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9월 09일
광개토왕代의 동북아 정세 -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http://kr.blog.yahoo.com/kjchuel/1862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국에 자주 침입하고, 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된 동호(東胡)의 후예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선비족이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 1세기 말 북흉노가 후한(後漢)에게 격파되자, 선비는 흉노에 이어 몽골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후 자주 후한에 침입하는 등 중국을 압박하였다. 선비족(鮮卑族) 모용씨는 3세기 초 이후, 요하(遼河)유역에서 세력이 커졌다. 그는 족장이 되자 진(晉)의 요서지방을 침략했으나, 패하여 진에 항복하였다. 그는 선비도독에 임명되어 금주지방을 근거지로 선정을 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영가의 난으로 진의 백성들이 투항해오자, 부내의 농경 등 모든 생산이 증가되었다. 또 중국인인재를 등용, 예제(禮制)를 정비하므로, 종래의 유목적 생활양식이나 문화가 크게 중국화하였다. 선비(鮮卑)의 단부(段部)·우문부(宇文部) 및 고구려를 격파하여, 뒤에 전연을 건국하는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동진과 관계를 끊지 못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에 봉해졌다. 모용 외(慕容廆)의 아들이다. 외가 죽자 요동군공(遼東郡公)의 자리를 이어받아 선정을 펴고, 중국문화 보급에 힘썼다. 후조(後趙)와 손을 잡고 선비족(鮮卑族)인 단부(段部)를 멸망시켜 그 땅을 빼앗았다. 이어 후조(後趙)와 싸워 이겨, 그 세력은 하북지방으로 신장하였다. 337년 동진(東晉)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끊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여 조양(朝陽)에 도읍을 정하고 문무백관을 두었다. 뒤에 고구려를 격파하여, 북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지린성눙안[農安]방면까지, 남은 장성을 넘어 북경 ·톈진 북방에서 산시성북동부에 미치는 대세력이 되었다. 내정면에서는 농경을 장려, 민생안정을 꾀하여 중국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자 도명(道明). 시호 무성황제(武成皇帝). 전연(前燕) 모용 황의 다섯째 아들이다. 동진(東晉)이 빼앗긴 화북을 회복하려고 전연을 공격해오자, 그가 이를 격퇴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형 위(暐)가 이것을 시기하므로,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밑으로 망명하여 세력을 키웠다. 370년 부견이 전연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뒤에 다시 동진을 치다가 대패하였다. 그는 이를 틈타 386년 도읍을 중산(中山)에 정하고 나라를 연(燕)이라 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이 후연이다. 화북 동부를 평정하고, 고구려 등에 점유된 모용씨의 구근거지인 요하(遼河)유역을 다시 빼앗아 국력을 크게 신장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선비탁발부(鮮卑拓跋部)의 압박을 받아 쇠퇴하였다. 존속기간이 짧기 때문에 16국 속에는 들지 않는다. 전연(前燕) 최후의 황제인 모용 위(慕容暐)의 아우 홍(泓)은 전연이 멸망한 후 전진(前秦)에 복속하였으나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패하자, 선비(鮮卑)와 규합하여 전진의 도읍 장안(長安)을 공격하여, 384년 연흥(燕興)이라고 개원(改元)하였다. 흥이 피살된 뒤 아우 충(沖)이 옹립되어 연제(燕帝)가 되었고, 장안을 점령하여 도읍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족이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충을 죽이고 영(永)을 세웠는데 영은 장자(長子:山西省 長子縣)에 근거를 두었다가, 394년 후연(後燕)의 모용 수(慕容垂)에게 병합되었다. 연(燕)이라고도 한다. 3세기 말 선비족(鮮卑族)의 추장 모용 외(慕容廆)는 극성(棘城:遼寧省)에 도읍을 정하고 대선우(大單于)라 칭하는 한편, 진(晉)의관작을 받는 반(半)독립적 체제를 만들었다. 전연(前燕)의 유제(幽帝:慕容暐)의 숙부인 모용수(慕容垂)가 부흥시킨 선비족(鮮卑族)의 나라이다. 문무에 뛰어난 모용수(世祖:武成帝)는 384년 연왕(燕王)이라 하고 중산(中山:河北省 定縣)에 도읍을 정하였다. 가장 융성할 때는 영토가 중산과 업(鄴)을 중심으로 한 화북평야(華北平野) 일대에서 북으로는 남몽골·한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북위(北魏)가 강대해짐에 따라 분쟁이 잦았고, 394년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파(參合陂:大同 부근)에서 대패하여 모용 수는 분사하고 북위군에게 중산이 함락되어 괴멸하였다. 이후 후연(後燕)의 4대왕 모용희(慕容熙)의 학정이 심하자 풍발(馮跋) 등은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慕容雲)을 왕으로 추대하였다(407). 모용운은 고구려인 고화(高和)의 손자로 고구려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이 당시, 광개토대왕은 모용운에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409년에 모용운이 살해되고 한인(漢人) 풍발(馮跋)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확한 종족·원주지(原住地)는 중국사료에도 기록이 일정하지 않으나, 아마도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跋部) 등과 같은 선비(鮮卑)의 한 부족으로서, 시라무렌(랴오허강상류) 유역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모용부에 복속하였고, 모용부가 탁발부에 의해 멸망하자 북위(北魏) 초 무천진(武川鎭)으로 옮겨 그 현민(縣民)이 되었다. 그러나 6세기 초부터 북위가 쇠퇴하자 그 틈을 타서, 557년 이 부족 출신 우문태(宇文泰)가 주(周:北周·後周)나라를 세웠다. 고구려와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와의 충돌은 293년(봉상왕2)부터 시작되었다. 342년 모용 황의 침입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어,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산속에 피신하였다. 황은 미천왕릉(美川王陵) 발굴, 왕모(王母) 납치, 남녀 약 5만 납치, 보물 약탈 및 궁실을 불사르고, 도성(都城)을 파괴하는 등 노략질을 하였다. 이로써, 343년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東黃城:江界)으로 옮기고, 왕제(王弟)를 연나라에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화의를 청하는 한편, 부왕의 유해와 왕모의 송환을 청하였다. 그러나 유해는 돌려 받았으나, 왕모는 억류되어 12년 뒤에 송환되었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十四年,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 平其城, 朕與皇后, 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경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 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 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 之志.
<故國壤王>三年, 立爲太子. 九{八} 年, 王薨, 太子卽位.
The King Guabgaeto, whose name was Tamduck, was the son of the King, Kogookyang.
His mind was heroic and great, even when he was young.
He became the Crown Prince at the third year of the reign period of his father King.
He mounted the crown, when his father King was dead at the ninth reign-period.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The seventh month in lunar calendar at that year, he invaded Paikjae, and ten castles were fell to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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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의 백제를 공격하여 성을 10개나 뽑아 버렸다. 담덕의 할아버지는 사유(斯由), 일명 쇠(釗)라는 인물이었다. 그 이름은 현대 우리말의 '쇠(steel)'임이 자명하다. '쇠'는 백제군과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바로 그가 고국원왕이며, 담덕의 친할아버지가 된다. 맏아들인 구부(丘夫)가 왕위를 이었으니, 바로 그가 소수림왕이다. '구부'는 아들이 없으므로 동생인 '이련(伊連)' 일명 어지지(於只支)가 왕위를 이었고, 그가 바로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의 장자가 바로 '담덕(談德)'이니, 바로 광개토왕이다. 담덕이 태자가 되던 당시 고구려의 主敵은 백제와 後燕이었다. 특히 燕과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쇠(釗) -- 구부(丘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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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련(伊連) -- 담덕(談德) -- 거련(巨連)( 또는 璉)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Ninth month of that year, he made an expedition to Kitan located at the north of Koguryo, and captured 500 Kitanese men and women, and also brought back the hundred thousand Koruryo people having been captured by the Kit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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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북쪽에 있었고, 고구려 백성을 1만이나 약탈했다. 당시는 백성이 가장 큰 전리품이었을 것이다.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 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Winter 10th month of the first year, The king attacked the Castl Kuanmie of Paikjae, the four sides of which were precipice and surrounded by sea. The king divided the army into seven routes of attack, and attacked the castle twenty days. After all the castle was f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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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닷물이 두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어디일까? 1990년대초 발굴조사되어 성터가 확인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오두산성(鰲頭山城)일 가능성이 크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오두산성을 고구려의 관미성으로 적고 있다.
The secon reign year of the King Kuangaetom, autumn senventh month, Paikjae invaded the southern border. The king ordered army to defend them. The king established nine Bhudist temples in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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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략했다"하였으니, 백제는 고구려의 남쪽에 국경을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구절에 "평양에 九寺를 창건했다"고 했는데, 이때 고구려는 아직 평양 천도를 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죽기 바로 전에 불교를 공인하여 복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불교 진흥은 선왕의 유지나 마찬가지였다.(삼국사기 고국영왕 본기 三月, 下敎: 崇信佛法求福. 命有司, 立國社, 修宗廟. 夏五月, 王薨. ) 또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어쩌면 선왕인 광개토왕 대에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서기 400년, 1월에 고구려가 慕容燕과 외교를 시도했으나, 2월에 燕왕 모용성이 화를 내며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서쪽인 新城과 南蘇城을 깨뜨리고 700리의 영토를 빼앗았으며, 그들의 백성 5천여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당시 상황은 아주 명료하다. 고구려가 燕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朝貢했다는 기록은 김부식이 원삼국사의 기록을 중국 기록으로 대체한 문구에 불과하다. 사실 한국 관련 사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朝貢 기사는 실제라기 보다는 이런 식의 我田引水적인 경우가 많다. 고구려가 조공을 하는 자세가 전혀 아니었으므로, 연왕 모용성이 고구려의 예의가 거만하다면서 3만 대병을 이끌고 침공한 것이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듯이, 요동과 요서를 차지하고 있던 두 태양이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新城과 거기에 인접한 南蘇城은 오늘날 중국 요녕성 무순(撫順) 근처이다. 거기까지는 이미 확고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燕을 세운 모용씨는 선비족이다.
Naver 백과사전: 선비족 [鮮卑族]
단석괴가 죽은 후에는 가비능(軻比能)이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중국에 자주 침입하였으나, 그가 위(魏)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다시 분열되어 3세기 중엽에는 모용(慕容)·걸복(乞伏)·독발(禿髮)·탁발(拓跋) 등의 부족집단이 내몽골 각지에 할거(割據)하면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점차 화북(華北)으로 옮겨갔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는 연(燕:모용씨)·진(秦:걸복씨)·양(凉:독발씨)이 화북에서 각각 나라를 세웠고, 북위(北魏:탁발씨)는 화북 전체를 통일하여 이른바 북조(北朝)의 기초를 열었다.
모용씨와는 거의 100년간의 투쟁의 역사다.
모용 외 [慕容廆, 269~333]
모용 황 [慕容皝, 297~348]
모용 준 [慕容儁, 319~360]
중국 5호 16국시대 전연(前燕)의 제2대 왕(재위 348∼360). 모용 황(慕容皝)의 둘째아들. 황의 뒤를 이어 연왕이 되었다. 후조(後趙)의 영토를 잠식하고, 350년(연원 2) 계(
:北京)에 도읍을 정했다. 염위(冉魏)의 후조를 멸망시키고, 352년 제위(帝位)에 올랐다. 357년(광수 1) 허베이성[河北省] 업(鄴)으로 천도하여 화북(華北:화베이)의 동부에 군림하게 되었다.
모용 수 [慕容垂, 326~396]
서연 [西燕]
전연 [前燕]
337년 아들 황(皝) 때에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단씨(段氏) 선비를 격파하여 허베이성[河北省] 북부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정하고 고구려의 도읍 환도(丸都)를 함락시켰다.
345년 진(晉)의 연호를 쓰지 않기로 하여 독립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자손은 황제를 칭하였고, 도읍을 업(鄴:河北省 臨漳縣 서쪽)에 정하였다. 그 통치 영역은 한때 허베이[河北]·산둥[山東]·산시[山西]·허난[河南]·랴오닝[遼寧]에까지 미쳤으나, 370년 모용 위(暐)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하였다.
후연 [後燕]
우문부 [宇文部]
모용부 [慕容部]
《사기(史記)》에는 중국의 삼국시대에 허베이성[河北省]의 우북평(右北平) 서쪽 상곡(上谷)에 이르는 지역에 모용(慕容)이라는 이름의 대인(大人:大酋長)이 인솔한 선비계 부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비족은 대인의 이름을 부족명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2세기경은 모용부가 활약한 시기라 추측된다. 3세기에는 다링강[大凌河] 하류지방으로 옮겨 유목생활 외에 농경도 하였다. 추장 모용 외(慕容廆)는 선비대도독(鮮卑大都督)이라 부르고 영가(永嘉)의 난을 피하여 투항해온 한인(漢人)을 임용하여 정무(政務)를 맡게 하였고, 중국풍의 예제(禮制)를 채용하였으며, 동진(東晉)으로부터 평주목(平州牧), 요동군공(遼東郡公) 등의 관작을 받았다. 이어 그의 아들 모용 황(慕容皝)이 즉위하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연왕(燕王)이라 부르고 수도를 용성(龍城)으로 정하여 허베이 일대를 점유하였다. 이것이 전연(前燕)이라 불린 나라로, 이후 성쇠를 거듭했으나 모용부에 의해 후연(後燕)과 남연(南燕)이 건국되었다. 5세기 초 북위(北魏)의 화북(華北) 통일로 북위에 병합되었다.
단부 [段部]
유양[漁陽]에 있던 오환(烏桓)의 대인(大人)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일륙권(日陸眷)이 대기근(大飢饉) 때 랴오시로 옮기면서 부족을 형성하였으며 그의 생질인 무목진(務目塵) 때는 진(晉)나라에 종속하여 3만여 가구를 통솔하였다. 4세기 초 랴오시공[遼西公]에 봉해진 석륵[石勒]을 격파하였으나, 그 후에 재공략의 실패로 내분이 일어나 350년 선비족의 모용 준(慕容儁)에게 멸망되었다.
모용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雲은 무예로써 동궁(태자)를 모셨는데, 모용보가 아들로 삼고, 慕容이라는 성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후연(後燕)의 4대왕 모용희(慕容熙)의 학정이 심하자 풍발(馮跋) 등은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慕容雲)을 왕으로 추대하였다(407). 모용운은 고구려인 고화(高和)의 손자로 고구려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이 당시, 광개토대왕은 모용운에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409년에 모용운이 살해되고 한인(漢人) 풍발(馮跋)이 집권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선비족인 燕의 운명은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에 따르면, 장수왕 24년에 燕의 임금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시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려 하면서, 위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 나라가 연 나라의 백낭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燕의 수도인) 화룡에 가서 연 나라 임금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 나라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 나라 무기고에 있는 정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 나라 임금이 용성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복판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정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 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 상시 봉발을 고구려에 보내 연 나라 임금을 압송하라고 하였다.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면서, 연 나라 임금 풍홍과 함께 위 나라 임금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 나라 임금은 고구려 왕이 자기의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 혈·낙평·비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였다.
즉, 서기 415년(장수왕 24년)에 선비족들은 고구려의 백성이 된다. 즉 현재 한국인들의 DNA속에는 선비족의 DNA도 섞여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인 최완수 선생은 鮮卑族의 한 갈래인 탁발부가 세운 北魏의 불상 등에 나타나는 인물의 용모를 평하여 "선비족은 미남미녀족이었다"고 말했다. (신동아)
# by | 2007/09/09 20:27 | 주몽과 광개토대왕 |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