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안내/ 우리 별자리 이야기

좀생이별, 세쌍둥이별, 짚신할미, 말굽칠성, 오누이별, 키별과 닻별 등
우리나라 고유의 별자리를 소개하는 [우리 별자리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며. 부모님과 읽으면 더 좋습니다.
지금 전국의 온라인 및 오프라인 서점에서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구매하실 때는 좋은땅 출판사를 확인하세요.
좋아요와 공유하기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예스24  
북센


by 도원 | 2023/12/11 16:39 | 우리별자리/출판 | 트랙백

고대 중국의 중심 일식 관측지의 추정(Observing Sites for the Central Solar Eclipses in Acient Chinese History)

http://jkas.kas.org/journal/article.php?code=76885&list.php?m=1
<초록 한국어 번역>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900년 사이,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식분이 큰 일식들을 관측한 장소를 결정하였다. 지구역학시와 세계시의 차이인 ∆T 값은 Morrison & Stephenson (2004)의 값을 채택하였다. 식분이 큰 일식 기록들은 고대 중국 왕조들의 수도가 변함을 고려하여 4그룹으로 나뉜다.
우리는 각 그룹에 속한 모든 일식을 어떤 문턱값보다 큰 식분으로 관측된 지역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이러한 관측 가능 지역이 역사적으로 알려진 수도의 위치와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일식은 각 왕조의 수도에서 관측되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일식 관측지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은,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400년 사이의 일식 기록 공백기에서도 Morrison & Stephenson (2004)의 ∆T 값이 틀리지 않았음을 뜻한다.
게다가, 우리는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일식기(日食旣)'라고 표현한 일식들이 모두가 개기일식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였다.
일식기 기록들의 평균 최대 식분은 0.96 ± 0.04이었다.
우리는 일식 기록을 보충한 표현들, 예를 들어 낮이 어두웠다, 일식 도중에 별(행성)이 보였다는 표현들이 일식기 기록이 개기일식이었음을 가능성을 더 강화해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각각의 표현들, 예를 들어 `(일식 도중에 해가) 소멸되지 않았고 갈고리 같았다(不盡如鉤)', `거의 소멸되었다(幾盡)', `일식 도중에 별이 나타났다(日食見星)', and `일식 도중에 낮이 어두워졌다(晝晦)' 등과 같은 표현들이 각각 어느 정도의 식분을 뜻하는지 알아냈다.
이것은 Können & Hinz (2008)가 개기식 진행 과정 중에 하늘의 밝기 변화를 물리학적으로 모델링한 것과 일치하였다.

by 도원 | 2022/11/18 19:02 | 도원눌어 | 트랙백

2022년 여름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by 도원 | 2022/08/30 10:40 | 도원눌어 | 트랙백

Helichnysum

by 도원 | 2022/08/20 15:46 | 창조의 저수지 | 트랙백

뉴턴의 프린키피아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ewton-principia/
STANFORD ENCYCOLOPEDIA OF PHILOSOPHY
데카르트의 책 제목을 거꾸로 뒤집은 이유.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the Principia was also seen as putting forward a world view directly in opposition to the broadly Cartesian world view that in many circles had taken over from the Scholastic world view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seventeenth century. Newton clearly intended the work to be viewed in this way when in 1686 he changed its title to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in allusion to Descartes's most prominent work at the time, Principia Philosophiae. (The title page of Newton's first edition underscored this allusion by placing the first and third words of the title in larger type.) The main difference in the world view in Newton's Principia was to rid the celestial spaces of vortices carrying the planets. Newtonians subsequently went beyond Newton in enhancing this world view in various ways, including forces everywhere expressly acting at a distance. The “clockwork universe” aspect of the Newtonian world view, for example, is not to be found in the Principia; it was added by Laplace late in the eighteenth century, after the success of the theory of gravity in accounting for complex deviations from Keplerian motion became fully evident.

by 도원 | 2022/08/19 16:30 | 도원눌어 | 트랙백

헤겔의 박사논문 De orbitis planetarum

https://hegel.net/en/v2133healan.htm

by 도원 | 2022/08/19 16:28 | 도원눌어 | 트랙백

wifi 개발한 천문학자

https://www.scienceinpublic.com.au/prime-ministers-prize/2009-science

by 도원 | 2022/08/19 16:14 | 도원눌어 | 트랙백

김찬영 [ 金瓚泳 ]

김찬영 [ 金瓚泳 ]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법조인.

개설
김찬영(金瓚泳)[1889~1973]은 한말에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판사로 재직하였다. 국권이 일본에 강탈되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재판 과정에서 변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법원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가계
김찬영의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심농(心農)이다. 아버지는 김종윤(金鍾胤)이고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활동 사항
김찬영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6년 서울 법관 양성소에 입학한 김찬영은 1908년에 법관 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한 제국 영동(永同) 지원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조선 총독부의 공주 지방 재판소 관할인 영동구 재판소에 판사로 근무하였지만, 1911년 일제 치하의 판사직을 거부하고 면직되었다.

김찬영은 일제 강점기 동안 안재홍, 정인보, 신채호 등과 민족주의 사상 고양에 힘을 다하였다. 1921년 조선 변호사 협회 창립총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고, 1921년에는 ‘흥농회(興農會)’를 조직하였다. 흥농회는 농사에 관한 연구 조사와 농업 증진 발전을 도모하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또한 1927년부터 조선 공산당 사건을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김찬영은 해방 후인 1946년 대법원 법관에 임명되었고, 1951년 탄핵 재판소 재판관과 헌법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52년 대법원 대법관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대법관을 정년 퇴직한 김찬영은 성균관 부관장에 선출되어 유학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 기념 사업회와 곽재우 기념 사업회 고문, 한국 종교 협의회 고문, 국악원 고문, 대한 변호사회 회장, 충남 향우회 회장, 5월 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찬영은 1973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김찬영이 사망하자 장례는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러졌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삼룡동에 김찬영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김찬영의 묘비는 1990년에 세웠는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념 사업회 회장인 김석원(金錫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by 도원 | 2022/03/21 15:40 | 도원눌어 | 트랙백

정초의 졸기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6월 2일 정미 3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예문관 대제학 정초의 졸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정초(鄭招)가 졸(卒)하였다. 초(招)의 자(字)는 열지(悅之)요, 경상도 하동(河東) 사람이니, 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의 아들이다. 을유년에 을과 제2인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제수되고, 정해년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제수 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사헌 집의(司憲執義)·판군자감(判軍資監)·승문원사(承文院事)가 되었는데, 다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을 겸직하였고, 이어 사간원 우사간 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 말하기를,

"초(招)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매, 경연관(經筵官)이 대답하기를,

"지금 사간(司諫)이 되었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招)는 경연에 없을 수 없다."

하여, 이내 사간으로서 경연관의 직무를 띠게 하였다. 기해년에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참의(參議)를 거쳐 승정원 우대언(承政院右代言)에 배명되고, 경자년 10월에 좌대언으로 승진되었으며, 임인년 겨울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계묘년에는 외방으로 나아가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어 하직하는 날,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6년을 시종(侍從)하였으니 내 어찌 하루인들 좌우에서 떠나게 하고자 했겠느냐. 그러나, 내가 외방을 중히 여김은 경도 아는 바이니, 임지에 가거든 모든 일을 삼가 처리하라."

하였다. 을사년에 들어와 형조 참판이 되고, 무신년 봄에 이조 참판으로 전보되었다가, 7월에 좌군 총제(左軍摠制)에 옮기고, 경술년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고, 신해년에 공조 판서로 승진되었으며, 계축년 6월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옮겼다. 정초는 천성이 총명(聰明)하고 영매(英邁)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한 데다가 겸하여 관리의 재질이 있어, 대체로 국가의 의제(儀制)170) 에 많이 참예하여 정한 바 있으며 역산(歷算)·복서(卜筮)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죽음에 미쳐 조시(朝市)를 2일간 정지하고, 부의를 내려 주고 치제(致祭)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하니,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요, 의(義)에 의하여 절제(節制)함이 경(景)이다. 동궁도 또한 미두(米豆)를 합해 20석을 부의하였으니, 대개 일찍이 세자의 빈객(賓客)을 지낸 까닭이다. 두 아들이 있으니, 정심(鄭深)과 정황(鄭況)이다.

by 도원 | 2021/12/23 10:25 | 창조의 저수지 | 트랙백

정흠지 졸기

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6월 16일(임진)
전 중추원 사 정흠지 졸기
전 중추원 사 정흠지(鄭欽之)가 졸(卒)하였다.
흠지의 자는 요좌(堯佐)이고 본(本)은 경상도 동래(東萊)인데, 고려 감찰 대부(監察大夫) 낭생(郞生)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총명하여 조금씩 자라매 글을 읽을 줄 알아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음관(蔭官)으로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법을 잡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좌정승 하윤(河崙)을 탄핵하다가 드디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태종 신묘년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병조 정랑·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서, 병신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하다가 마침내 그 노비를 속공(屬公)하게 되니, 은이 내각(內閣)에 들어와서 일을 아뢰다가 인하여 속공함이 적당치 못함을 스스로 진술하매, 흠지가 상소하여 탄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적당하고 간절하였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통쾌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파면당하였는데, 은의 꺼리는 바가 되어 4년 동안 쓰이지 아니하였다가, 세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으로 기용(起用)되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 등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기밀(機密)을 맡아서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다. 세종이 일찍이 철원군(鐵原郡)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흠지는 홀로 아뢰기를,
“이제 짐승을 많이 잡은 자를 벼슬시키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려고 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충청·경상·전라 세 도의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바닷가 고을의 성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을묘년에 국가에서 함길도에 회령 등 진(鎭)을 새로 설치하여 군무(軍務)와 민사(民事)의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우므로, 세종께서 흠지를 관찰사로 삼고자 하여 의정부와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흠지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늙은 것은 한 개인의 집 사사로운 일이며 변경의 일은 중한 일이니, 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고 하여, 드디어 보내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정흠지를 관찰사로 삼고, 김종서를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내가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어서 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고기·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한 때문에 소환(召還)하여 중추원 사에 임명하고,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자,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고기를 먹기를 권하고, 어의(御醫) 두 사람을 보내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찰하게 하고, 연달아 문병하며 여러 번 내자시(內資寺)의 좋은 음식물을 내렸다. 죽음에 미쳐 나이가 62세인데, 임금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자를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며, 특별히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으로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며, 의(義)를 펴고 강하게 행함은 경(景)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수려(秀麗)하여 밖으로는 화(和)하고 안으로는 강(剛)하여 바라보기가 엄연(儼然)하였다. 평상시에 책보기를 좋아하여 한사(漢史)를 외어서 말하므로, 세종이 일찍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흠지가 언제 사기(史記)를 이처럼 익혔는가.”
하였다. 또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는 대체에 따르기를 힘쓰고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기를 가르쳤다. 아들은 갑손(甲孫)·인손(麟孫)·흥손(興孫)·창손(昌孫)·희림(喜霖)이고, 육손(六孫)이 있다.

by 도원 | 2021/12/20 10:03 | 트랙백

이순지 졸기

이순지의 자(字)는 성보(誠甫)이며 양성(陽城)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 행수(東宮行首)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世宗)은 역상(曆象)이 정(精)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文臣)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李純之)가 추구(追究)하므로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었다. 처음에 이순지가 추산(推算)하여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이라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온 자가 역서(曆書)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 강(强)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규표(圭表)·태평(太平)·현주(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命)을 받아 이룬 것이다. <----- !!!!!!!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옮겼다가 정축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삼으니, 승직(陞職)을 사양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따로 경(卿)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 외방에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고쳐서 제수하였다. 매양 진현(進見)할 때마다 임금이 급히 일컫기를,
“부왕(父王)께서 중하게 여긴 신하(臣下)이다.”
하고, 여러 번 상(賞)을 내려 주기를 더하더니, 을유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병(病)으로 졸(卒)하였다.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精巧)하며,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의 학(學)에 자상하였다. 그러나 크게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
만년(晩年)에 그의 딸 김귀석(金龜石)의 아내는 사노(私奴) 사방지(舍方知)와 간통하고, 항상 여복(女服)을 입혀 여러 비녀(婢女) 속에 나란히 있게 하였다가 함께 동침(同寢)하여 대관(臺官)이 탄핵하게 되었으나, 임금이 추구하여 치죄하지 않고 드디어 사방지(舍方知)를 이순지에게 부쳤는데, 이순지는 잘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일을 송사하니, 사람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었다.
정평(靖平)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집사(執事)에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아들이 6인이니, 이부(李扶)·이지(李持)·이공(李拱)·이파(李把)·이포(李抱)·이국(李挶)이다.

by 도원 | 2021/12/20 10:03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