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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 2010/12/31 01:52 | 도원눌어 | 트랙백 | 덧글(2)

어떤 투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이 회사는 다음과 같은 요약된 영업실적 및 주요투자지표를 보여왔다.
뭔 말인고?
매출액: 2003-2005년 사이에 매년 30%씩 성장.
자기자본순익비율(ROE)는 18%를 꾸준히 유지 중.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것이다.
주가자본비율(PBR)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 시기에 이 회사의 주가는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회사의 자기자본이 계속 증가하였다는 말이다. 또한 PBR<1이므로 이 회사의 싯가총액은 이 회사의 청산 가치 미만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회사의 현재 PBR=1.6정도로 그 동안 저평가가 많이 완화되었다.)
주가순익비율(PER): 주가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이 주가 상승분을 초과한다는 말.
결론적으로 상당히 꾸준하게 돈을 창출해내고 있으며, 그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에 비해 주가는 상승하지 않는다는 말.

이제 이 회사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알아보자.
우선 회사가 주주들을 위해 주가를 높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알아본다.

이 회사는 매년 상당한 양의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다. 참고로 이 회사의 주식수는 대략 8700만주이므로, 매년 200만주를 매입한다는 것은 2.2%의 지분을 자사주로 매입함을 의미한다. 배당은 상당히 가파르게 증가하였고, 2005년이후로는 매년 1만원 정도를 배당해 오고 있다.

당신이 2001년에 처음으로 이 회사 주식을 주당 10만원에 샀다고 하자.
2005년에 이 주식이 주당 20만원이 되었다.
그 동안 당신은 배당금으로 3만원을 받았다. (싯가 배당율은 4%)
이때 당신이 이 주식을 팔았다면? 그 5년 동안 10만원을 투자해서 배당금 3만원과 주가차익 10만원을 벌었다.
5년간 수익율은 130%이고, 연간 26% 정도의 수익율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그 동안의 추세나 한국 산업에서 회사가 차지하는 위치로 보아 적어도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익을 창출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회사 주식을 판 것이 잘한 일인가?

그 뒤 5년이 더 지났다.
주가는 65만원으로 뛰었고, 그 5년 동안 매년 1만원의 배당을 받아서 총 5만원을 벌었다. (싯가 배당율은 1.5%)
10년간 총 배당금은 8만원, 싯가차익은 55만원이다.
따라서 10년간 10만원을 투자하여 63만원을 번 것이므로, 총 수익율은 630%이고 연간으로 환산하면 63%의 수익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사실 우리나라 업계에서 배당금은 회사의 성장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
또한 이 회사는 이익을 주주에게 환원하는 방식으로 배당 이외에 자사주 매입을 하였다.
더군다나 회사가 창출한 이익 전부를 환원하지 않고 경영상의 판단에 따라 유보금을 쌓게 되는데,
이러한 유보금이 재투자된다.
ROE가 18%이므로, 자사주 매입에 2% 더하기 배당 2%해서 대충 5%를 주주에게 환원하고 나머지 13%는 재투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재투자라는 것은 금융으로 말하면, 복리와 마찬가지이고, 13%의 복리이자로 10년간 투자하면, (1+0.13)**9=3.0, 즉 원금의 3배로 돌려 받게 되니, 원금에다가 원금의 2배를 이자로 더 받게 된다.
따라서 10년 동안 주주에게 환원된 5%*10=0.5배와 이 2배를 합하면, 10년 동안 원금 10만원의 2.5배를 더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익 창출력을 가진 회사의 주가는 프리미엄을 더 받게 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주식에도 분명히 복리투자의 개념이 있다.

이 회사는 원래 정부가 현금 출자를 통해 키운 공기업이었는데,
민영화 후 거의 즉각적으로 외국인 투자한도가 폐지되었다.
외환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명분으로 IMF는 국내 주식의 외국인 소유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고,
이에 따라 정부가 1997년 말에 외국인 투자 제한을 폐지하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얼씨구나하고 국내 블루칩을 단(!) 며칠 동안에 헐값으로 사들였다. (IMF 직후이니 헐값일 수밖에 없었다.)

이회사는 1988년과 1989년 국민주라는 방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싸게 매각되기도 했는데, 당시 주가는 1.5만원 정도였다.
20년 투자의 결과는 3567%, 연 178%.
(1+r)**(n-1)=35.67 --> n=20이므로 r=0.2
즉 20%의 복리 예금을 든 것과 같다.
이 정도면 약하게나마 로또에 맞은 거라 보면 될 것이다.
당신이 20년 전에 내가 다니던 대학의 등록금이 1년에 100만원 정도였다.
4년간 등록금 400만원으로 이 주식을 샀다면, 지금 1.5억원정도가 되었다.
당시 25평짜리 국민주택이 약 5000만원이었으니깐, 그 돈으로 이 회사 주식을 샀다면, 지금은 약 18억원이 되어 있다.

즉 10여년 전에 이런 회사 주식을 싸게 산 투자자라면, 이 주식을 지금 팔아서 주가 차익을 보는 게 유리할까?
질문을 조금 달리 해서, 별로 망할 이유도 없고, 꾸준한 성장을 하는 어떤 회사의 주식을
1만원에 샀는데, 지금 그 회사는 매년 5000원의 배당을 주고 있고, 주가는 20만원이 되어 있다.
싯가 배당율은 2.5%니깐 은행 이자보다는 조금 못하다.
그러나 당신이 초기 투자한 1만원에 대해서는 연 50%의 이자를 주고 있는 셈이다.
이 회사 주식을 지금 팔아서 19만원을 챙기는 게 좋은가?
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망할 이유도 없고 꾸준한 성장을 하면서 배당도 섭섭하지 않게 주므로 그냥 보유해야 하지 않나 싶다.

by 도원 | 2010/02/10 19:26 | 도원눌어 | 트랙백

토요다

토요다의 결함과 1천만대에 달하는 리콜,
별 것 아닌 것도 리콜하려면 부품과 인력 등 10만원 정도는 들 것인데,
아마도 기어박스와 같이 비싼 물품이 문제거나 콘트롤 전자장치를 교체해야한다거나 하면 그 10배는 들겠지만,
적게 잡는다면, 한 리콜로 인한 손실이 대략 1조원이상일 것이다.
현대차가 2010년 한 4조원을 바라본다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손실이 될 것이지만.
현대차보다 4-5배 규모가 크고 차의 부가가치가 또한 높으니 토요다의 영업이익에는 10%나 영향을 주려나.
다만 브랜드 이미지 손상으로 판매대수의 급감과 그 여파가 몇 년이나 갈지가 걱정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토요다 캠리를 2만불, 우리돈으로 2400만원 정도에 팔겠다는 매장도 있단다.
나같으면 그 가격이면 당장 캠리를 사겠다.
현대차는 미국에서만 토요다를 버리고 현대차를 택하면 120만원을 깍아준단다.
그런데 현대차는 왜 한국의 고객들에게는 이런 혜택을 주지 않는 건가?
현대기아차의 한국 시장 점유율이면 독과점으로 공정위에서 제제를 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회사에 어떤 분이 미국에서 한 1년 살다가 왔는데,
거기서 몰던 베라크루즈를 배로 싣고 왔는데, 가격차이가 1천만원이 나더라는...

by 도원 | 2010/02/05 19:29 | 도원눌어 | 트랙백

축구 대표팀에 대한 주저리 주저리

치열한 주전 경쟁이 예고되고, 신구세대의 물갈이와 조화가 문제.
골키퍼의 노령화 문제.
4:4:2 시스템을 가정하고...
빠르고 키가 큰 수비수의 보강이 문제이나, 4명 정도는 구성할 수 있지만, 백업맨이 2-3명 필요.
미드필더는 경쟁이 치열할 분야이고, 문제가 없으나,
뚜렷한 기량을 가진 게임메이커 선수 1명과 중거리슛이 강력한 선수 1명이 필요하다.
프리킥과 코너킥 전문선수 필요.

공격수는 스피드와 신장이 문제인데, 박주영은 반드시 넣어야할 거고. 나머지 한 선수와 어떤 시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 고민.
내가 볼 때, 최대의 문제는 역시 골키퍼와 발빠르고 몸싸움이 강할 수 있는 수비수가 문제인 듯.

이운재(1973) 골키퍼. 늙음.
김영광(1983)
정성룡(1985)
김승규(1990)
-----------------------------
오범석(1984) 오른쪽 풀백, 중앙미드필더
김동진(1982) 왼쪽 풀백, 측면미드필더
이영표(1977) 왼쪽 풀백
이정수(1980) 중앙수비수
곽태휘
차두리
김진규(1985) 수비수?
------------------------------
이청용(1988) 미드필더
김정우(1982) 미드필더
박지성(1981) 왼쪽(오른쪽) 미드필더
기성용(1989) 중앙미드필더
김남일(1977)
김두현
염기훈?
백지훈(1985)?
오장은(1985)?
구자철(1989)-중앙미드필더
이호(1984) 수비형 미드필더
------------------------------
박주영(1985)*
이동국(1979)
이근호(1985)?
신영록(1987)
김승용(1985)?
김보경
박희성(
김동섭(1989)
김민우(1990)
이승렬

by 도원 | 2010/01/13 17:46 | 도원눌어 | 트랙백

안정복, 고려사를 읽다

"안정복, 고려사를 읽다"는 종로 영풍문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순암 안정복 선생은 "조선 최고의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분인데, 물론 우리 문중 조상님이라서 그 책에 관심이 갔지만, 책의 내용도 내가 경험하는 일들이라서 흥미로웠다.

우리 업계 사람들은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가서 유명한 학자의 수택본을 하나 건지는 것을 로망으로 여긴다.
수택본이란 옛 사람이 (대개 유명한 학자가) 직접 토씨를 달아 놓았거나 메모를 해 놓은 책을 말한다.

2009년 여름에 20만원주고 1845년에 청나라에서 출간된 책 한 권을 샀는데,
원래 1질이 31권인 책의 제3권으로서
규장각에는 바로 이 권3이 빠진채로 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그 권3을 팔고 있었다.
규장각 도서에는 여러가지 도장들이 찍혀 있는데 이 책에는 도장이 없다.
(글을 쓰다 보니, 규장각에서 그걸 확인해 보지 않았네...)
아무튼, 이 책 덕분에 논문 하나 썼으니, 20만원은 아깝지 않다.

탐나는 고서는 한 번 나왔을 때 사두지 않으면 또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고서 뿐만이 아니다.
어디건 박물관에 가서 도록이 비싸다고 안사면 결국 후회한다.
비싸면, 다음에 다시 왔을 때 사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두고 보면 그 박물관엘 언제 다시 갈지도 모르고, 다시 갔다해도 그 물건이 남아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사고 싶은 것은 그때 사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
사지 못한다면 사진이라도 찍어 놔야 한다.

고서나 그림은 도록으로는 전혀 실물의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진품과 가품은 느낌이 확 다르다.
감정 평가의 기법을 공부하기에 앞서서 많은 경험을 하다보면 "진품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아무리 좋은 도록도 실물의 생동감을 느끼게 하기 어렵다.
또한 명품은 느낌이 매우 다르다.
"고것 참 탐나네." = "고것 참 갖고 싶네."란 마음이 생기게 하는 물건이 명품이다.

한번은 경상도 통영에 있는 마리나 리조트엘 갔는데,
거기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통영의 명품인 나전칠기를 팔고 있었다.
워낙 소품들이라서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 그런 가게에 나와 있을리가 없다.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접어서 세워둔 병풍을 보게 되었다.
주인에게 구경하게 해달라 양해를 얻고서 림 감상에 들어갔다.
그 병풍은 누가 그린지는 모르겠고 아주 근대작인데 제품은 아니고 직접 그린 것이다.
내용이 이순신 장군의 평생을 그린 그림 병풍이었다.
"이것 소장하고 틈틈히 보면 좋겠군."이란 탐심이 일었다.
의외의 진품 명품을 만나는 경우다.
주인에게 가격을 물으니, 그건 파는 게 아니라고 한다.
몇 번 더 이야기를 해 보았으나, 아주머니는 완고하다.

명품들은 대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주인이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댐 수몰지구에 살던 고택 등에서 많은 귀중본과 서화 문서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단다.
무게를 달아서 팔 정도였다는데.
조상들은 귀중한 것이라 모아 두고 애지중지한 것을
무식한 후손들이 그 값어치를 모르는 경우다.
그러므로 소장가들은 자신의 소장품을 아낀다면 자기가 죽은 다음도 챙겨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키던지,
아니면 그 물건이 제 값을 발휘한 사람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두어야 하겠다.

by 도원 | 2010/01/01 02:17 | 도원눌어 | 트랙백

2009년 내 이글루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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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40132017132114101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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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랙백 :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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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핑백 : 8개
 200200030010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5. 2008-2009 포스트 수 비교 (2008년 포스트 : 340개)
 383337403713192022172313252132141910351317213622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6. 내가 보낸 글 통계
 0100240 
 테마태그가든보낸트랙백보낸핑백블로거뉴스 



7. 내이글루 명예의 전당
  • 1년 동안 작성한 글
    •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5,078장 분량이며, 원고 두께는 약 36cm 입니다.
    • 1년 동안의 글을 문고판 시리즈로 낸다면 25권까지 낼 수 있겠네요.
  • 내 태그 TOP 3 & 태그 대표 블로그 (해당 태그를 가장 많이 작성한 이글루)
    1. 역사 (15회) / 초록불의 잡학다식
    2. 경제 (10회) / BackBeat
    3. 천문학 (10회) / 보구자
  • 가장 많이 읽힌 글은 마늘장아찌 만드는 법 입니다.
  • 가장 대화가 활발했던 글은 OB맥주 어쩌나? 입니다. ( 덧글 21개 )
  • 내이글루에 가장 덧글을 많이 쓴 사람은 초록불 입니다.

by 도원 | 2010/01/01 01:57 | 발리학회2005여름 | 트랙백

安省 할아버님의 교지

王旨
安省爲嘉靖大夫江
原道觀擦黜陟史
兼監倉安集轉輪勸
農管學事提調刑獄
兵馬公事者
永樂十二年四月二十二日

태종 14년 (1414년)
조선 영조 27년(1752년)에 이 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세운 어필각에 보존되고 있다.
즉 이 교지는 태종 이방원의 친필이다.

by 도원 | 2009/12/26 11:49 | 도원눌어 | 트랙백 | 덧글(2)

ELS 투자 유의점

원금보장형: 금리가 고점일 때
Down-barrier ELS: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될 때
-명목금리는 마이너스 상태로 1년간 있었던 적이 없다.
-명목금리=인플레
-중요한 포인트: knock-in barrier가 있는 것은 위험함. --> 젠장!!!
Booster ELS: 금리가 바닥일 때, 유동성 장세를 확인한 이후에 투자하면 좋다.
-1년후 100%

이어지는 내용

by 도원 | 2009/12/22 20:53 | 도원눌어 | 트랙백

2008년 시골의사 아주대 강연을 보고...

1993년에 엑스모자이크(X-Mosaic)가 나왔을 때, 나는 그 겨울에 즉시 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때 대학 교육망이 이미 깔려 있었고, 학과에 랜 공사를 거의 그 즈음에 했었다.
연구용으로 들어온 썬의 스파크(Sparc)에 엑스 모자이크가 느리게 떴는데, 내 홈페이지는 국내에서도 아주 초기의 홈페이지에 속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일류 학과도 이때 웹싸이트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걸 흉내내서 뭔가 만들었었고, 프리프린트 목록을 싣고 클릭으로 다운로드를 하게 서비스하지고 건의했다가 쓸 데 없는데 시간을 들인다는 핀잔을 들었다.
사실, 그때 이후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의 프리프린트를 받아 보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웹이 나오기 전에는 우편으로 배달되던 것을 3달 후에나 받아 보곤 했다.
기존 논문을 서베이하려면 매년 마지막 호에 붙어 나오는 인덱스를 전부 훑어야 했다.

암튼.  나는 원래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 키드 1세대였다. 정부에서 학교마다 사준 삼보트라이젬과 삼성 SPC-1000의 마스터였다.
중학교 학생이 통계를 배워서 학생들의 성적처리 코드를 만들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략 486이후에는 기계가 너무 복잡해지고 소프트웨어가 소스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흥미를 잃었다.

8비트 컴퓨터인 애플II를 만든 그 애플이 지금의 아이파드와 아이폰을 만드는 그 애플사이다. 1976년 4월 1일에 애플 I로 창립하여 1977년 1월 3일에 주식회사가 되었다. 1977년 4월 16일 애플II가 나왔다. 1984년에 맥킨토시가 나왔다.
내가 컴퓨터를 처음 본 것이 1984년의 일이었는데, 바로 이때 컴퓨터가 어느 수준이었냐면, 당시 "인컴"이라는 회사가 제물포역 광장에 애플II+ 한 대를 가져다 놓고 멀리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했다. 전철역을 드나드는 행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컴퓨터를 보면서 비켜갔다. 그러다가 저녁무렵에 전철역전에서 일하는 지게꾼이 그걸 싣고 가버리더란다.

그런 시절에 내가 그 어린 나이로 컴퓨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후 당시 금성, 삼성, 대우에서는 자이로그-80이라는 CPU를 사용하는 8비트 컴퓨터와 MSX방식의 그래픽이 화려한 컴퓨터를 내놓았다. Zilog는 지금도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회사인데, 이 칩은 나중에도 야구장의 전광판이나 지하철 역에 붙어 있는 열차 도착 시간 표시장치를 구동하는데 사용되었고, 소위 임베디드 컴퓨터(embedded computer)에도 광범위하게 쓰였다. 간단한 기계가 고장이 나질 않을테니깐...(참고로 애플II는 6502란 CPU를 썼는데, 당시 인텔이나 모토롤라가 만들던 칩보다 6분의 1 가격에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스티브 잡스 등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해준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칩을 만든 사람은 척 페디와 빌 멘쉬이며 1975년 MOS Technology에서 만들었다. 지금의 인텔은 8080이라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놓았었다...)

물론 전자 대리점은 내 놀이터였고, 제물포 역에 단 하나 있던 컴퓨터 가게도 기억이 나지만, 학교 전산실이 제일 좋은 놀이터였다. 문제는 방학때여서, 하는 수 없이 전자 대리점에서 놀았는데, 우연히 발견한 효성컴퓨터 가게에는 아이들이 없어서 놀만 했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효성컴퓨터는 약간 기업용 전문가용을 취급했으므로, 아이들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가전제품 대리점에 모여드는 아이들은 사실상 컴퓨터가 목적이 아니라 게임을 하러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애들과 굉장히 달랐던 것 같다.
교육 방송에서 일요일 아침에 나오는 방송통신대학 컴퓨터프로그래밍 강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방송통신대학을 통해 임창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한문도 배웠고, 맹주억 선생에게 중국어도 배웠고, 이때 배웠던 것들이 지금도 밑천이 되고 있는 것 같구나..)

부울대수(Boolean algebra)는 비교적 쉬운 축에 속했고, 나중에 대학에서나 배울 이산수학(descrete algebra)을 잘 알게 되었다. (사실 대학에 가서 이런 것들을 다시 수업을 들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너무 재미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내가 대학에서 컴퓨터에 재미를 못 붙인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쉬운 것은, 당시 전자공학은 배울 방법이 없어서 부울대수와 논리회로를 연결짓지 못한 채로 있다. 또 하나는 효성그룹이 그때 하던 컴퓨터 사업은 왜 접었을까? 하는 거다. 암튼, 그때는 애플사를 운영하던 스티브 잡스 형님이나 나나 거의 같은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잡스 형님은 이웃에 살던 공대 다니던 형님에게 회로공학을 좀 배웠다는 게 다를 뿐.

그런데 지금도 미스테리는 한국은 왜, 시작은 거의 동시에 하고 앉아 있으면서,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제패하지 못했을까? 하는 거다. 사실상 애플은 최근에 와서야 진가를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윈도우즈란 방식도 그가 맥킨토시에서 구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선 IBM PC를 많이 쓰지만 미국에선 다르다.) 어쩃든지 간에, 만일 내가 더 똑똑하고 세상 물정에 밝았고 나이가 3살만 더 먹었었어도, 어쩌면 한국의 빌게이츠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 또래에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해서 IT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벤처 열풍이 한창일 때, 스톡옵션을 수십억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회사에 남아 있다가 거품이 꺼지면서 그 수십억이 다 날아간 경우들도 많다고 한다. 왜 떠나지 못했을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세계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막상 갑부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게 이공계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그 기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더 관심이 가는 거다.
그 기술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할지, 그걸로 어떻게 돈을 벌지가 아니라...
대학 4년은 내 생각에 거의 시간 낭비가 아니었나 싶다.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 시간을 들였다.
1학년때는 아직 운동권의 시대라...
2학년때는 별을 보면서 지냈는데, 좀 더 교육을 잘 받았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성장해 있었을 것 같다.
차라리 군대나 다녀와서 유학이나 갔어야 했다.
1996년 초에 부잣집 아이들이 들고다니던100만원이 넘는 무전기 같이 생긴 모토롤라 핸드폰을 보면서, 왜 나는 그 무전기 같은 핸드폰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단지 삐삐와 핸드폰이 의미하는 것이 현격한 성장 환경의 차이로만 인식이 했었을까? 박경철은 그걸 캐치했단 말이지.

난 도대체 뭘 본 거야?
1983년에 애플II 컴퓨터를 마스터하여 전교 성적처리 코드를 짤 정도였지만 스티브 잡스처럼 되지 못했고,
그후 10년 후에 엑스 모자이크와 홈페이지의 세계에 한국에서는 가장 처음 발을 디딘 축에 들었음에도 작금의 인터넷 세상의 길목을 지키며 재미를 보고 있지 못하고,
핸드폰을 보고도 시골의사처럼 주식에 올인하기는 커녕 주식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주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전철타고 함께 통학하고 친하게 지내던 지금은 스님이 된 그 형이 받은 주식 배당금을 통해서였다. 그 형의 형님이 조금 사준 것이랬다. 그땐 그냥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안 것이다. 신문의 주식 시세표는 그냥 대충 넘기다가. 주식 투자와 경영학, 재무관리 등등 소위 인문계 종목을 접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 참을 지나서 2004년 첫 직장에 들어가고 케이블 테레비에 경제 채널을 보면서이다. 물론 그때는 투자를 하지 못했다. 홈트레이드 시스템이 없었으니깐... 직장에 매인 사람은 직접 증권사를 찾아가고 전화질을 했어야 했다. 하긴 그때 맨날 전화통에 소리를 질러대던 친구가 있긴 했다.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아마 그때가 뭔가 주식이 폭락했던 때였을 것이다.

같은 대상을 보고,
그 중요한 일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이 세상을 바꿀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을 것일까?
10년 후에 또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인가?
주가가 세 배 정도 오른 것은 W가 아니다.
시골의사는 명동 사채시장에서 사모았던 한국이동통신 자사주 주식이 SK로 넘어가서 결국 5-6년 만에 약 250배가 뛰었단다.
월급에서 60만원 정도의 필수 생계비가 남기고 모두 쏟아 부었다고 하니,
적어도 10억 정도는 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의 현재 재산은 수천억원이란 소리다.
트렌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0.1%의 인간이 창조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변모시키고,
0.9%의 인간이 그 창조력의 결과에 투자를 하고,
나머지 99%의 잉여인간들은 웬 동키호테식 발상이냐며 지금도 충분히 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0.9%의 인간은 투자에 대한 댓가로 돈을 벌었다면,
그 0.1%의 천재들에게는 무슨 댓가가 돌아갔을까?

by 도원 | 2009/12/13 00:45 | 도원눌어 | 트랙백

효녀 심청

한국인은 효성과 충성을 강조한다.
논어에 나오는 "愼終追遠"이란 말을 아시는지?
심청은 효도의 화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뱃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심청를 심봉사가 지팽이를 짚고 따라가는 참혹한 장면을 그려놓고,
"심청이는 효녀인가?" 발제문을 적어 놓고는, 그걸 초등학교 꼬맹이들에게 토론을 시키고 있다.
이런 의문형 발제문은 심청은 효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이다.
어떤 동화책은 심청의 어머니인 죽은 곽씨부인의 착한 친구인 뺑덕 어미가 심청에게 "이런 불효막심한 년! 아비 눈을 뜨게 하려고 네 목숨을 버린다고? 너 죽고, 네 애비가 눈을 뜨면 그 눈에서 피눈물밖에 더 나겠냐?"라고 호통을 친다.
이런 하수들에게 우리 애덜을 맡기다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심청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금새 "심청=예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청은 그녀의 부모가 명산대천에 빌어서 낳은 아이다. (신성성(divinity)이 있다.)
심청은 순교를 한 것이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회적인 부조리에 의해 강제로 인당수로 몸을 던져진 것이 아니다.
심청이 밥을 빌어 먹기 시작한 것도, 심청이 없는 틈에 아버지가 죽을 뻔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고,
남녀칠세 부동석이 지엄한 법도인데 처녀가 밥을 빌러다녔으니 상당한 자기 희생을 한 것이다.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정화수 떠놓고 기도를 밤마다 하였고
그 결과, 꿈에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인당수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지
뱃사람들이 처녀 제물을 찾을 때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도 아니다.
심청은 깊은 종교적인 믿음과 기도의 결과, 자발적으로 인당수에서 "순교"를 한 것이다.
죽음의 세계인 용궁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연꽃을 타고 지상으로 돌아와 (즉 부활하여!)
그녀의 희생의 결과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머지 사람들도 개평으로 눈을 뜨게 되고, 심지어 눈먼 짐승들까지도 일시에 눈을 뜬다. (이게 판소리 심청가의 가사이다.)
심청의 효심에 감동한 것이 부처님이건 하느님이건 하나님이건 그 행위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는 인간성(휴매니즘)의 화신이자 구원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춘향가는 한물 간 판소리 사설이 아니라 그것은 종교인 것이다.
한국의 교과서나 아동서 작가들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두고
"마리아가 자식을 잃은 슬픔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겠냐?"라고 따지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원전을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을, 학자입네 하는 인간들이 그것을 볼 생각도 안하고
개똥철학이나 읊어대고 앉아 있으니...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이렇게 저급하니깐
우리 아이들이 품성을 잃고 별별 이상한 짓들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

이어지는 내용

by 도원 | 2009/12/01 21:03 | 도원눌어 | 트랙백

論評 연합뉴스/서울신청사부지서 조선시대 무기 무더기

서울시청의 신청사 예정부지에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 등이 발견되었다. ...
다음의 기사는 기자가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보도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불랑기자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 발사시키는 화기로 15세기에 포루투갈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제작돼 1517년 무렵 중국 광동 지역에 서역상선을 통해 동양에 전래됐다. '불랑기'가 어떤 말에서 유래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서양 사람 이름에 흔한 '프랑크'(Frank)를 옮긴 표기라는 말도 있다.(연합뉴스)"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겠다.
우선 불랑기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 발사시킨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모포에서 쉽게 불리시킬 수 있는 자포가 있어서, 이 자포를 미리 장전해 두었다가, 자포를 교체해가면서 연속 발사를 할 수 있게 개량한 점이 중요한 사항이다.
둘째, 중국인들은 처음에 포르투갈인들을 포란치(佛郞機-불랑기)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십자군 시대의 중세 프랑크(Frank) 왕국을 아랍인들이 페링기(Feringhi)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페어뱅크, 라이샤우어, 크레이그 1965, 동양문화사, (서울:을유문화사) 144쪽) 서양 사람이름에 흔한 프랭크(Frank)에서 연유했다는 말은 아주 비전문가다운 언급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불랑기란 이름이 처음 나오는 것은 중종15년(1520년)과 16년(1521년)이니, 중국에 다녀온 외교관이 그 즈음 중국에 온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는 대목이다.


“사신 1인에 수행원은 20여 인이었습니다. 신 등이 그들과 이야기해 보니 그들의 마음이 매우 개명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책을 보니 글씨 체가 진언(眞言)·언문(彦文)과 비슷하였는데 비길 데 없이 정세(精細)하였습니다. 의복은 거위 털로 짰는데 모양은 단령(團領)처럼 생겼고 아래 폭은 매우 넓었으며, 머리로부터 뒤집어 써 입게 되어 있는데다가 단추나 옷고름이 없었습니다. 음식은 닭고기와 면식(麪食)만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 나라의 토산(土産)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풍속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비록 군장(君長)이라 할지라도 왕비는 한 사람뿐이고 아내가 죽으면 다시 장가들지 않는다고 합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16년)”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이후 불랑기에 대한 언급이 뚝 끊겼다가, 임진왜란 이후 明軍이 평양성 탈환작전을 할 때, 호준포와 함께 주요 중화기의 하나로 불랑기포를 언급하고 있다. 그 이후, 불랑기포의 위력에 감동한 조선이 그것을 모방해서 주조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발견된 불랑기포는 명종18년(1563년)에 조선인이 제작한 것이 확실하므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서 주조된 불랑기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형태가 양란이후 주조된 불랑기포와 매우 다르다.) 
초기의 동아시아 불랑기포는 구리로 만든 동포였다. 이것은 화약의 폭발력과 관계가 있다. 너무 폭발력이 세서 철포로 주조하면, 웬만큼 두껍지 않고서는 포신이 깨져 버렸으므로,  포신을 상당히 두껍게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질긴 구리로 불랑기포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불랑기포가 철포인지는 신문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는 게 없으니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불랑기포를 처음 접한 것은 1517년이 맞고, 1521년에는 그것을 모방하여 제작하였다. 1530년에 불랑기포가 대량 주조되었다. 한편, 1553년 마카오에 자리잡은 포르투갈인들은 1557년 明의 허가를 얻어 보카로 대포 주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는 이른바 불랑기포와 탄환을 제조하여 마카오 자체 방어용, 후금의 위협을 받고 있던 明, 그리고 동남아시아 각지에 무기를 팔아먹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불랑기포가 明의 것을 본 받았는지, 아니면 마카오의 것을 본 받았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글을 쓰다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주 자세한 설명을 담은 웹싸이트가 있다. 참고 바람.
http://blog.naver.com/sj97in?Redirect=Log&logNo=90018305419
이 싸이트의 사진자료를 둘러 보면, 저기 인도네시아 자바 등지에는 널려 있는 게 그러한 대포 유물인데, 한국의 박물관들은 왜 그런 것을 구매해서 연구하고 전시하지 않을까? 우리 것이 아니더라도, 연구용으로 비교 전시용으로 구매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저 사람들이 엿 바꿔 먹기 전에...

by 도원 | 2009/11/30 21:28 | 도원눌어 | 트랙백

녹십자 가문의 상속세

녹십자의 허영섭 회장이 별세하셨다고 한다.

허영섭 12.37% + 가족(부인 1.49%+ 세 아들 2.83%) --> 16.69%
     16.69% + 0.75%(최근 매입) --> 17.44% 
     상속세 물납의 경우, 상속가액이 커서 세율은 50%임. 상속세를 물납한다고 하면,
     허영섭 회장의 12.37%의 50%만이 남고, 여기에 미망인과 세 아들들의 지분을 합하면,
            12.37%*0.5(세율) + (미망인 1.49% + 세 아들 2.83%) = 6.185% + 4.32% = 10.05%

허일섭 회장의 동생과 그 가족이 갖고 있는 지분은
허일섭 9.01% + 가족 = 9.92%
허일섭 회장 일가가 최근 0.32%의 지분을 매입하여 총 지분은 10.24%가 됨.

허영섭 회장의 아들들이 최근 녹십자홀딩스의 지분을 매입하지 않았다면, 최대주주가 바뀜.
최근 0.75%의 지분을 매입을 함으로써, 최대주주 자리를 유지하게 됨.

*중요한 것: 고 허영섭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858억원 = 녹십자 362억원 + 녹십자홀딩스 496억원.
상속세 세율은 과세표준액에 따라 다르다.
과세표준은 재산가액-공제액=상속재산가액-(공과금 + 장례비 + 채무)

예. 주택 2.8억, 토지 10.5억, 합계 13.3억. 채무 0.15억.
증빙서류 있는 장례비용 300만원, 각종 공과금 200만원.
배우자와 자녀 2명(23세와 18세)
배우자가 5억을 상속 받으면

1. 기초공제 2억원,
2. 배우자상속 5억원

3. 자녀공제, 6천만원 (자녀 1인당 3천만원)
4. 미성년자공제: 1000만원=500만원*2년 (2년은 20세까지 2년)
--> 합: 0.7억

5. 일괄공제: 5억 (1+3대신에 적용가능) 1+3은 2.6억이므로, 일괄공제를 택하는 게 유리.
6. 과세표준=13.3-(5+5+0.05+0.02+0.15)=3.08억  (장례비용은 최소 500만원, 0.03대신에 0.05로 함)
3.1억원은 과표구간 20%의 세율임. 따라서 3.08억*0.2-누진공제 = 6160만-1000만=5160만원

7. 자진납루할 경우 10% 공제.
따라서 내야할세금은 5160만원*0.9=4644만원.

과세표준1억원 이하는 10%,
1-5억원은 20% 누진공제 1천만원,
5-10억원은 30%, 누진공제 6천만원,
10-30억원 40%, 누진공제 1.6억원,
30억초과 세율 50%, 누진공제 4.6억원.

문제: 정부와 여당은 중소기업의 가업 상속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상속 세제를 개편할 예정이다. 다음 중 현행 상속세제와 관련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상속세 최고 세율은 40%이다.
② 상속세와 증여세는 같은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③ 15년 이상 경영한 중소기업을 상속할 때는 일정부분을 공제해 준다.
④ 최고 세율이 적용되는 과표 구간은 30억원 초과분부터이다.
⑤ 상속세는 일정한 경우 물납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by 도원 | 2009/11/16 17:55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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